티스토리 뷰

저는 해마가 단순히 '기억 저장소'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뇌인지과학 강의를 접하고 나서야 해마가 과거를 붙잡는 곳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치매가 걱정되기 시작한 건 비단 부모님 세대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뇌혈관 문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저도 이게 남 일이 아니겠다 싶었거든요. 해마를 어떻게 쓰느냐가 곧 뇌 건강의 핵심이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원샷러닝, 인공지능이 아직 못 따라 하는 것
뇌인지과학에서 해마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 바로 원샷러닝(one-shot learning)입니다. 여기서 원샷러닝이란, 단 한 번 경험한 일도 즉시 기억으로 저장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 한 번만 겪었어도 기억해낼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해마가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현재 가장 발달한 인공지능 기술인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은 방대한 빅데이터를 무수히 반복 학습하며 패턴을 추출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계 학습이란 수많은 데이터를 반복 입력해 거기서 규칙성을 찾아내는 지능 구현 방식을 말합니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해마의 원샷러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입니다.
이 부분은 뇌과학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도 꽤 충격적이었는데, 인공지능이 바둑이나 게임에서 인간을 압도한다는 소식은 익숙하지만, 정작 '어젯밤에 뭘 먹었냐'는 질문에 답하는 건 아직 인공지능이 못 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됐달까요.
해마가 특히 기록하는 것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시간 순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맥락입니다. 이를 뇌인지과학에서는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일화 기억이란 특정 시공간 맥락 안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을 기록하는 기억 시스템을 뜻합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서 해마가 가장 먼저 손상을 입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그래서 초기 증상이 '방금 한 일을 기억 못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출처: National Institute on Aging)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긴다는 표현도 여기서 이해가 됩니다. 알코올이 해마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 일화 기억으로 기록되지 않는 것이거든요. 젊을 때야 무용담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마비가 반복될수록 해마에 누적되는 손상은 가볍지 않다는 걸 이제는 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원샷러닝: 한 번 경험으로 즉시 기억 — 인공지능 기계 학습으로 현재 구현 불가
- 일화 기억(episodic memory): 장소·시간·맥락을 묶어 저장하는 해마의 핵심 기능
- 알츠하이머성 치매: 해마가 가장 먼저 손상되며, 초기에 일화 기억 장애가 나타남
- 알코올: 해마를 일시 마비시켜 기억 기록을 차단 — 반복 시 누적 손상 우려
해마 트레이닝, 거창한 방법은 없었다
해마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뭔가 특별한 훈련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답은 예상 밖으로 단순한데, 기억을 만드는 것만큼 중요한 게 그걸 꺼내보는 것이라는 겁니다.
해마는 쓸수록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런던 택시 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복잡한 도시 경로를 매일 기억하는 직군의 해마가 일반인보다 유의미하게 컸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PNAS, Maguire et al.). 근육처럼 자주 쓰면 발달하고, 쓰지 않으면 위축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쓰면 될까요. 일기를 쓰는 것,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 옛 기억의 디테일을 애써 떠올려 보는 것이 해마를 자극하는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생각보다 효과가 체감됩니다. 가족과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어릴 때 기억을 꺼내 디테일을 맞춰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반면 화투나 게임처럼 규칙 기반의 활동은 치매 예방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저도 의외였는데, 화투나 카드가 치매 예방에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게임 규칙을 반복하는 것과 일화 기억을 꺼내는 것은 뇌에서 서로 다른 회로를 쓰는 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물론 화투를 치면서 나누는 대화, 누가 어떤 패를 냈는지 기억하는 맥락이 해마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게임 자체가 해마를 트레이닝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50대에 판단력과 추론 능력이 정점에 이른다는 일부 종단 연구 결과도 흥미롭습니다. 이른바 시애틀 종단 연구(Seattle Longitudinal Study)가 그 근거로 자주 언급되는데, 20대의 반응 속도와 집중력이 50대의 판단력·요점 파악 능력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만 이를 모든 인지 기능이 50대에 최고라고 해석하는 건 지나친 일반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구가 측정하는 인지 기능의 종류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거든요.
편도체(amygdala)와 해마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편도체란 해마 끝에 붙어 공포·불안 같은 강렬한 정서 반응을 처리하는 영역입니다. 극도로 두려운 경험은 편도체를 통해 과학습 상태가 되어 쉽게 잊히지 않는데, 이것이 심해지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PTSD란 극심한 충격 경험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일상을 반복 침범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최근에는 가상현실(VR)을 활용해 해마가 기억을 꺼내는 순간 그 내용을 덜 고통스러운 맥락으로 덮어쓰는 치료법이 연구되고 있는데, 아직은 임상 연구 단계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해마가 손상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나요?
A.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새로운 사건을 기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해 같은 질문을 반복하거나, 시간 순서가 뒤섞이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서 해마가 가장 먼저 손상된다는 연구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증상이 의심된다면 신경과 전문의 상담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Q. 일기 쓰기가 정말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나요?
A. 일기 쓰기가 치매를 완전히 막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해마 트레이닝 방법으로 뇌인지과학 관점에서 충분히 타당합니다. 해마는 일화 기억을 저장하는 것뿐 아니라 꺼내보는 과정에서도 자극을 받기 때문입니다. 일기 쓰기가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오늘 있었던 일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Q. 술을 자주 마시면 기억력이 진짜 나빠지나요?
A. 알코올은 해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과음으로 필름이 끊기는 현상은 해마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일화 기억이 기록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해마에 누적 손상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젊을 때의 습관적 음주는 노년의 기억력 저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Q. 호두 같은 견과류를 먹으면 뇌에 좋다는 말, 맞나요?
A. 호두 모양이 뇌를 닮았다고 해서 뇌 건강에 특별히 좋다는 건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견과류에 포함된 오메가-3 지방산이 신경세포 건강에 기여할 수 있다는 연구는 있습니다. 특정 식품을 뇌 건강의 정답처럼 여기기보다는 균형 잡힌 식단과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뇌를 10%만 쓴다는 말, 사실인가요?
A. 뇌를 10%만 쓴다는 속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100%가 어떤 상태인지 과학적으로 규정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가설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뇌는 활동에 따라 다양한 영역이 복합적으로 활성화되며, 뇌 세포의 수나 뇌 크기보다 신경망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느냐가 인지 능력에 더 중요한 변수입니다.
해마에 대해 알게되면서 제가 가장 먼저 바꾼 건 저녁 식사 습관이었습니다. 밥 먹으면서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오늘 있었던 일을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거창한 뇌 훈련 프로그램이 아니라, 기억을 꺼내보는 일상적인 대화가 해마를 자극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치매 예방이나 뇌 건강을 이야기할 때 어떤 특별한 음식이나 게임에서 답을 찾으려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일상의 루틴을 돌아보는 것이 더 실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짠 음식을 줄이고 더 걷고 잠을 일찍 자고,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해마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쌓아가는 습관 안에 있습니다.
